그대 몇 발자국 뒤에 서서 김풍배 오랜 세월 물같이 흘러도 간절함이이렇게 변치 않는 것은그대 몇 발자국 뒤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흰 구름처럼 무시로 변하는 마음도이렇게 변치 않는 것은그대 몇 발자국 뒤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이는 공 같아서때로는 잘못 굴러 멀리가고멀어져 다시 굴리다가 부딪히면부딪힌 만큼 아파서 더 멀어지지요 힘겨워 쓰러질 땐달려가 안아줄 수 있는 것도기뻐서 웃을 땐달려가 함께 웃을 수 있는 것도그대 몇 발자국 뒤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한 번쯤 돌아보아주어도깜짝깜짝 놀라는 기쁨당신의 뒷모습만 보아도 행복
고향이 어디냐고 묻거든 김풍배 올라 갈 수도 없고뛰어내릴 수도 없는 그 곳,수직으로만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축대, 그 틈새에서 민들레 한 포기 태어났다 굴참나무 묘목 하나 사다가 화분에 심었다는 할머니 얘기를 간직했다 세상이 빙빙 도는 갈증온 몸이 타들어 갈 때절망 같은 축대 속으로뿌리를 뻗어 내려갔다 깊이깊이 박힌 뿌리생고무 같은 몸은거친 바람도 흔들지 못했고화로 같은 햇볕도 태우지 못했다 백양사 입구에 늘어 서있는 굴참나무 꿈을 꾸던 날노란 꽃 하나 피웠다 어느 날 지나다 보니하얗게 늙어자식들을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자식들은
김밥 꽁다리 김풍배 납작납작 동글고 예쁘게 썰어진 것은격의隔意 있는 손님에게나소풍 갈 때 가져가고꽁다리는 이물任意없는 사람끼리 나눠 먹지 제 각기各基 삐져나온 고물들생김새는 지질이 못났어도먹어 본 사람만 알지김밥은 꽁다리가 진국이란 걸 동생들, 자식들반듯반듯 공부시켜, 출세시켜 세상으로 내보내고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줄줄이 모시다가 천국 보내고죽어라 땅만 파며 사는 김밥 꽁다리 같은 사람들우리 농촌 사람들
꽃이 되는 길 김풍배 천 가지 의견에 만 가지 생각틀린다, 잘못됐다 손가락질하다가도뒷모습 다시 보고내민 손가락 안으로 접으니잃은 것 같지만 얻는 게 있네 꽃 고우면 잎 덜 곱고입 고우면 꽃 덜 고와금상첨화, 다홍치마 좋긴 하다만꽃 곱고 잎 곱긴 흔치 않고크고 단 참외 많지 않다네 갈지자걸음 걷다보면 길 잃을까 남의 손 들여다보지 않고 있는 것 미욱하게 가꾸다 보니 생각지도 않게 잎이 꽃 되네
아라메 길 김풍배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길아라메 길 강당 골 들어서면해 따라 웃음 짓는 마애삼존불백제의 미소가 잔잔히 흐르고보원사지 5층 석탑, 당간지주고려의 얼이 아른아른 서려 있다길 아래 흐르는 물은평화를 창화하고길 위에 나는 산새는자유를 노래한다 굽은데 없고 감춘데 없고은은하며 한결 같은 길오는 줄 모르게 오르고먼 줄 모르게 멀리 왔구나!개심사에서 마음 문 열어온 세상을 가슴에 담는다 걸어간 사름들, 다녀간 사람들마음도, 살아감도같아질게다, 닮아질게다추억의 길, 희망의 길아라메 길이여!
순망치한脣亡齒寒 김풍배 지구 자전축이 기울고나라가 뒤틀리고마을과 생명이 사라졌다 성난 땅은 아직도 꿈틀대는데방사선이죽음의 사자처럼 떠다니며떼죽음 속에 건져진남은 자를 떨게 한다 설움의 역사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는데가로막아 가칫거려쫄딱 망했으면고소할 줄 알았는데 날 세워 할퀴려드는망나니 큰바람 막아주고성난 흑 곰처럼 일어서서 덤벼드는바다를 막아 주는구나! 이제와 보니견원지간犬猿之間이 아닌순망치한脣亡齒寒이었다 희망의 꽃은절망의 진흙 속에서 핀다남은 자들이여!일어나라!포기는 희망의 가장 큰 적이다 미움은 잊었다우리도 울고우리도 아파하마
노송 김풍배 얼거친 바람 한번 훑고 갈 때마다천근무게 눈 한번 쌓일 적마다싸매고 여미고 다지기십 년 또 수십 년 그리고 수백 년 상순 위로 올릴 때마다올린만큼 아래로 뿌리 내리고옆으로 가지 벌릴 때 마다벌린 만큼 사방으로 뿌리 뻗어위아래 좌우로 균형 맞춰 살아 왔다 여기 그냥 서 있었다고 비웃지 마라세월만 축냈다고 허투루 보지마라궂은 비 내리던 바람 부는 날 밤소리쳐 울던 울음소리 들어 본적 있는가? 노송은 그냥 되는 게 아니다 내 몸에 더껑이 진 보굿을 보아라내 가슴속에 새겨진 나이테를 보아라얼마나 많은 세월을 어떻게 견뎌 왔는가
959전(顚)960기(起) 김풍배 인생길은수많은 요철(凹凸)을 오르내리며막이 내릴 때까지걸어가야 하는 길 일시의 성공에교만과 나태를 버리지 않는다면나부끼는 성공의 깃발은 내려지고 일시의 실패에도겸손과 끈기를 버리지 않는다면목표의 푯대엔 성공의 깃발이 걸릴 것이다 일흔 살에 운전 면허증을 손에 쥔959번 넘어지고 960번째 일어난차사순 할머니를 보라 960번 만에 이룬 성공보다959번의 실패가 아름다운 것은결승선까지 최선을 다하는 선수가더 아름다운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한 번의 성공과 실패로인생은 끝나지 않는다실패가 960번을 넘지 않
힘들거든 생각하라 /김풍배 그대여!남북 이산가족의 상봉 장면을본 적 있는가?애끓는 그리움을짐작이라도 해 본 적 있는가? 그대여!땅속 622미터지하 갱도에 매몰되었다가69일 만에 생환한 칠레 광부들의구출 장면을 보았는가? 그대여!가족끼리 소원하거든이산가족을 생각하라세상 살기 힘들거든매몰 광부의 지하를 생각하라 그대여!뻗으면 손닿을 가족이함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오늘도 무사히 하루의 일을 마치고집으로 돌아 올 수 있다는 게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구제역 김풍배 창자처럼 세상 일꼬이고 꼬이는 일 많다해도생목숨 끊는 일보다 더꼬이는 일 있으랴? 커다란 눈 껌뻑거리다못내 주르륵 흘리는 체념의 눈물십자가 지고 쓰러지며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소도 울고주인도 울고수의사도 울고 워낭 소린 흙으로 돌아가고텅 빈 울안엔 남긴 情만 가득쓰다듬은 얼굴들 되살아 어릿거려들여다보다 발길 돌리며 또 한 번 운다.
바람소리 / 김풍배 문 흔드는 소리에새우잠 자다 놀라 깨어 보니지나가는 바람소리였습니다동짓달 밤이 길은 게 아니라그리움이 길었습니다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건오직 꿈 속 뿐꿈속도 사람 사는 세상인데깨고 나면 왜 이리 허전할까요? 심란한 마음 달래려밖으로 나오니노오란 달만 높이 떠있습니다달이 아니라동그란 당신의 얼굴이었습니다 돌아서면 금방 잊을함께 했던 일상들이이제는 하나 같이그리움이 되었습니다 꽃을 보아도맛있는 걸 먹어도반쪽은 텅 비어있어당신 몫은 그리움으로 채웁니다 이제는놀라지도 않을 바람소리잊자 해서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가을을 타는 사람 김풍배 가을이 되면시름시름 앓아야하는 병 한 없이 올라간 파란 하늘옥양목 같은, 티 하나 없어마음이 서글퍼지는 병 추억의 조각들처럼놀이터 옆집 벽에 붙어있는 담쟁이 잎소슬한 바람 훑고 가면물결처럼 그리움이 일렁거리는 병 여름 다 간줄 모르고밤 이슥하도록 울어대는늙은 매미의 넋두리 소리에가슴 쓸어내리며 울적해 지는 병 명함을 태운다멀어진 인연들 나뭇잎인양 떨어낸다허튼 맹세 같은 이름은 연기로 피었다가불꽃 속으로 사라진다 명함도 없는데도렷하게 새겨진 이름하나 지울 수 없다 가을을 타는 사람깊고 머언 가을 속으로휘적휘적
아! 백제 -백제 대제전- 김풍배 / 본지 논설위원 부여에서, 공주에서 백제가 살아났다사람들도 부활하고 사비성도 돌아왔다낙화암에선 삼천궁녀가 다시 낙화가 되고조룡대에선 소정방이 백마로 용을 낚고 있다계백장군은황산벌 싸움을 앞두고아내와 자식들 목을 베고 있었다 흥망성쇠한 나라가 어디 백제뿐이던가?그러나 흥왕하고 찬란했던 융성한백제는 간 곳이 없고어찌하여 망국의 슬픈 한만 보이는가? 무령왕비의 금관에 매달려 번쩍이는금제 관식을 보아라!금동 향로에선 아직도백제의 향이 피어오르지 않는가? 부여가 나은 신동엽 시인은껍데기는 가라고 외치고 있
태풍2-공정한 사회- 김풍배 중심 기압 960 헥토파스칼태풍 ‘곤파스’가 북상하고 있다고매 시간 뉴스마다 특보로 알려준다 고요하다, 바람 한 점 없다실바람 솔바람 살랑바람 치맛바람까지모두모두 어디로 갔나 했더니바람이란 바람은 다 징집되어 서귀포 앞 바다로 몰려갔단다 감췄던 것 ,숨겨 놨던 것지나다가 은근 슬쩍 봐 뒀던 것이참에 올라오며다 파헤친다던데 지연 학연 바람 타면 겁날게 뭐 있어?이곳에서 살다간 바람여기 지날 땐 옛정 생각해서라도 스리슬쩍 눈감아 주겠지? 기대는 처참하게 무너졌다학연 지연은 애초부터 없었다부잣집 통유리창도 내
악 연 /김풍배 생각해보니 참 악연이다추호도 네게 해를 끼친 적이 없다일면식도 없을뿐더러 피 괄은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그런데 무심코 내 집으로 들어가는데 갑자기 총을 쏘다니...선거에 같이 나선 적도 없고아무리 족보를 톺아봐도 조상끼리 싸운 역사도 없는데하필 내 대에 와서 왜 이런 악연으로 만났는지 알 수가 없다욱하는 성미에 네 목숨 앗아 놓고 보니 후회막급이다셋까지만 세며 생각했어도 한 생명 구했을 텐데...아무래도 수양부족이다 재판장에게 따지겠지애초부터 하늘에서 낸 자리가 따로 있느냐고...새로운 자리치고 너무 편안하고 비도
새벽에 만난 어떤 사람 /김풍배 비가 오면 빗길을 가고눈이 오면 눈길을 가고볕 좋은 날이면 맨 길을 가고장화 한 켤레면 넉넉하리라 낮엔 벗어 여름대로 살고밤엔 입어 겨울처럼 살고유월이 한 여름 같다고 뭐 그리 대순가?헐렁한 파카 옷 한 벌이면 충분하겠지 다 버리고 다 내려놔도물은 생명의 근원유사시엔 물도 양식호주머니 꽉 차도록그래서 두 병씩 챙겨 넣은 게야 신문 몇 장 옆구리에 끼었지신문은 세상 내다보는 창문一日不讀書(일일불독서)하면 口中生荊棘(구중생형극)이라(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다소 묵었으면 어떠랴펴
대못 김풍배 가슴팍에커다란 대못 하나 박혀 있습니다채 아물지 않은 못 자국도숭숭히 남아있습니다 뽑아낸 자리를 살펴봅니다세월에 흔들려 뽑힌 것도 있고더러는 남들이 뽑아 준 것도 있지만대부분은 내 손으로 뽑아 낸 것들입니다 다가온 것은 구름이었지만내게는비가 되고 눈이 되고우박이 되었습니다 새털처럼 날아와박힌 대못은나 혼자 집착하여 만든 굵다란 허상하나 같이남들은 까맣게 잊어버린 깃털이었습니다 찔린 상처에는용서와 사랑이 묘약이었습니다스쳐가면 스친대로무심하면 무심한대로잊으면 잊힌 대로 고집 같은하나 남은 대못이젠 그것마저 뽑아내렵니다
안전거리 김풍배 껌처럼바싹 붙어살고 싶었습니다할 말 못 할말툭툭 털어놓고 싶었습니다 내게서 그의 싹이 날 무렵그에게도 나의 싹이 틀 무렵 툭 던져진 그의 말에내 싹이 부러졌습니다나도 화가 나서그의 싹을 싹둑 잘라버렸습니다 너무 가까우면가시에 찔린다는 고슴도치 말 사람과 사람사이도차처럼안전거리 확보가 필요하다는 걸가시에 찔린 후에야 알았습니다.
벤쿠버의 눈물 김풍배 전 국민을행복의 도가니에 넣었던벤쿠버 동계 올림픽거긴 미끈거리는 인생살이의엑기스를 담아 놓은 설원, 빙판이다 찰라가 운명을 바꾸고흘리는 눈물조차도세상살이만큼 다양하다 온 세계인의 요정 피겨의 여왕 김연아 선수천근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흘리는안도의 눈물, 보람의 눈물, 행복한 눈물 필살의 트리플 악셀을 성공하고도영원한 이인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아사다 마오의 통한의 눈물 일등을 하고 웃다가 실격판정에 울어버린삼천 미터 계주 쇼트트랙여자 선수들의 억울한 눈물 코치의 실수로다 잡았던 필생의 꿈을 날려버린만 미터 빙속
존재 가치2 김풍배 모진 바람 맞으며 서 있는 벼랑 끝 한 그루 소나무도절벽에 위태하게 서 있는 바위 덩어리 하나도존재 의미가 부여 된다면나 세상에 태어나 여기에 있는 것도어떤 의미가 있을게다 봄을 휘어잡아 오월을 독차지 하는 장미꽃이나청상과부의 절개인양 찬 서리 속에 피는 국화꽃 같이나 여기에 조촐하게 피어 있는 것도그 어떤 가치가 있을게다 꽃 속에 핀 또 다른 꽃을 들여다보듯내안의 나를 들여다본다 원석은 장인이 다듬어 보석을 만들고사람은 스스로 다듬어 보석이 되지허망하게 지나온 세월에목에 뭐가 걸린 것처럼 밭은 기침이 자꾸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