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 사진이유? 찍지마유~ 찍으면 초상권 걸규. 백 기자 형 저는 권혜연 씨처럼 신문에 날 자격이 없는 놈인데 뭘 저를 다룬다구 그류~?”

자기 신체능력에 맞게 개조된 차에서 휠체어를 내리면서 능숙하게 옮겨 타는 그가 말한다. 장애인들 중 사진 찍히기를 유난히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 경험상으로 잘 생긴 장애인은 더 그렇다. 하지만 무수히 설득해서 기어코 사진에 담았다. 사진 때문에 나중에 아프지 말았으면 한다. 조수석 뒷좌석에 넣어 둔 휠체어를 오른손으로 잡아 운전대 위로 넘겨 차문 열린 틈으로 내밀고 아주 능숙하게 옮겨 탄다. 오랜 기간 해온 생활 덕분이다. 보고 있으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야 이사람아. 양승일이 자격 없으면 대한민국의 거의 대부분의 정치인 등은 살 가치도 없어. 왜 그러는 거야? 당당히 살아가면서.”

양승일 씨의 겸손에 본 기자는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양승일(41) 씨는 소아마비 1급으로 애초부터 두 다리를 사용할 수 없었다. 사용할 수 없으니 퇴화가 되어서 다리는 어린아이 같다. 그러나 그는 생활보호대상자도 아니고 차상위 계층도 아니고 어엿한 직업인이다. 양승일 씨는 8년째 대리운전으로 픽업차량을 운행한다.

두 다리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차를 자신에 맞게 개조하여 벌써 8년째 대리운전을 한다. 양승일 씨가 속한 대리운전 회사는 6천콜이지만, 지인들은 그를 양대리 운전이라고 한다. 양대리는 서산시의 양대동을 일컫는다. 그의 성을 딴 우스개 소리다.

“자네 새해되면 걸어다니기로 우리랑 약속했잖아? 왜 공약 안지켜?”

“새해가 2013년만 있간유? 2014년도 있구. 2015년도 있구. 새해는 얼마든 있는데 그 공약 지켜야 할 새해가 꼭 올해여야 할 이유가 뭡니까?”

그렇게 허튼소리 싱거운 소리로 자신의 장애로부터 오는 한계나 한을 털어내는 양 씨다. 그의 허튼소리 싱거운 소리가 결코 가벼운 농담만이 아닌 이유다.

“저는 사회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도 없고, 잘살고 모범적인 면이 없어요. 저를 기사로 다루신다니 거참 (기사화 하는)기준이 이상해요. 안 다루시면 안돼요?”

양 씨는 인터뷰 내내 자신이 신문에 다루어질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겸손해 했다.

“양 씨를 안 다루면 누굴 다루나? 양 씨만큼 떳떳하고 당당하게 사는 비장애인 있으면 소개시켜줘요.”

양 씨의 차는 운전석이 여느 차와 몹시 다르다.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니 가속기와 브레이크 페달에 발이 닿을 리가 없다. 그래서 운전석은 양 씨가 운전할 수 있도록 개조했다. 가속하고 싶으면 레바를 당기고 감속하고 싶으면 레바를 내리면 차가 선다. 그외 깜빡이나 전조등은 비장애인과 똑같다. 그 개조된 자신의 차에 적응하느라 몇 년이나 걸렸단다.

“그 몸으로 학교는 잘 다녔어요?”

“학교라니요? 제가 어렷을 적엔 장애인에 대해 지금 같은 배려가 전혀 없었어요. 초등학교 입학은 했는데, 학교 가는 거 교실에 들어가는 거, 책상에 앉는 거 친구들과 노는 거 자체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다리중 하나만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면 모든 학교를 다 다니고도 남을 의지를 가진 양 씨였다. 가만히 생각해본다. 내가 만약 두 다리를 갑자기 사용할 수 없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양 씨는 다리를 사용할 기회를 태어날 때부터 가져본 적이 없다.

“취학 전에는 우리 집 방안을 그리고 우리 동네를 많이 청소하고 다녔지요, 다리 못쓰니께 뭉개고 다녔을 거 아뉴? 그럼 바닥이 깨끗해지는 거지 뭐”

그랬다. 양 씨가 태어난 1973년경 만해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 자체가 지금과 많이 달랐다. 배려해야 한다는 개념도 없었고, 오히려 놀리는 아이들이 많았던 기억을 우리는 조금씩 가지고 있다. 양 씨는 장애인의 회한을 그렇게 정리하고 우스개로 받아넘기고 있었다.

양 씨는 1973년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는 누나만 6명이고 아들이 유일하게 양승일 씨 인 것이다. 그래서 누나들과 부모님이 그렇게 애틋하게 양 씨를 마음에 담았나보다.

“지금 누구랑 살아요?”

“아버지랑 살아요.”

“어머니는?”

“몇 년 전에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어머니 이야기를 하다가 양 씨는 목이 잠시 메이는지 말을 멈추었다.

“이래서 나 인터뷰 안하려고 했는디. 왜 그걸 물어서 마음 심란하게 해유?”

그의 어머니가 어떤 마음으로 아들을 대했을지, 그는 또 어떤 마음으로 어머니의 품을 떠났을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어머니 이야기 후엔 가족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부모님과 누이들의 가슴을 태우고 자신은 아파했을까? 얼마나 힘들게 이겨 냈으면 이렇게 허튼소리 싱거운 소리로 가볍게 받아칠 수 있을까? 승일 씨는 얼굴에 웃음기와 장난기가 떠나질 않는다.

“그래 대리운전하며 힘든 점은?”

“저는 대리기사를 목적지에 실어다 주기만 하면 되니 어려운 건 별로 없어요. 어쩌다가 술 마시고 힘들게 하는 사람은 있지요. 새벽 두 시면 일이 다 끝나요.”

“많이 벌겠네. 아버지 용돈 드릴정도?”

“많이는요. 굶어죽지 않을 정도지요. 허탕도 많이 치고요.”

“제일 멀리 가본 곳이 어디예요?”“전라북도 익산요. 하루 가스비 3만 원 정도는 돈벌이가 되든 안 되든 들어가요. 그냥 남 신세 안질 정도로 살지요.”

양 씨는 정말 알뜰하다. 무얼 사도 남보다 먼저 사는 법이 없다. 어떤 상품을 양승일 씨가 샀다면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산 것이나 마찬가지다.

“가장 고맙거나 힘을 주는 가족이 누구예요?”

“우리 가족 모두지요. 누구랄 것도 없어요. 부모님 누나 여섯. 아~ 이제 큰누나는 돌아가셨으니까 다섯 분 누나 모두가 고맙지요.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고.”

“친한 대리운전기사는 누구예요?”“사무실에 열 다섯 명 정도 되는데 모두 친해요. 다 잘해주고요.”

“제일 친한 장애인은 누구예요?“

“상표형과 경수형이예요 거의 매일 보잖아요?”

“어라. 그 양반들이 형이야? 외모로는 승일 씨가 형인데?”그렇다 어려서 마음고생 몸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양 씨는 첫 인상이 무척 노숙해 보인다. 본 기자도 10여 년 전에 본 기자보다 형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입만 열면 아이같고 천진난만해서 한참만에 나이를 물으니 기자보다 한참 어렸던 기억이 새롭다.

“다리말고 몸 어디 아팠던 기억은?”

“그런게 어디있어요?”

“왜 이래 몇 년전에 병원에 실려간거 아는데 그게 무슨 치료 받은거죠?”

“예 심장혈관 조형술요”

양 씨는 평소에 보면 매우 수줍음을 많이 탄다, 인터뷰를 한사코 사양한 것도 실은 수줍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 때문이다. 아마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는 현실서 사회적 관심이나 보살핌의 수단이 없던 시절에 집안에서만 있는 경우가 많아 다양하고 많은 사람을 접할 기회가 적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대화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어린나이에 고착된 성격이라 짐작을 해본다. 수줍은 성격. 나서지 않는 성격, 두 다리를 사용할 수 없는 현실이 혈액순환에 지장을 주었을 것이라고 유추해본다, 지금은 완전히 건강한 상태다.

“한 때는 방황 많이 했어요. 상표 형이랑 양대리에서부터 둘이 눈 오는데 미친 듯이 휠체어 밀고 시청앞 광장까지 내달려도 보고. 술집도 전전해보고 그런 시절이 있었지요, 20대 시절에 그랬어요. 왜 그랬는지 지금은 이해가 안가요. 그런데 그땐 그렇게 방황했어요.”

‘자신이 장애인인 현실이 아파서?“

“장애인 현실이 아파서는요. 그땐 철없어서 그런거죠. 철없어서... 지금은 하래도 힘들어서 못해요. 지금 같은 생각이면 못했을 텐데 아무튼 그땐 그랬어요. 몇 년 동안은요.”

“그래 참 장해요. 그런 세월을 그렇게 이겨냈구나.”

이 대화는 7년 전 쯤 했던 대화다. 이번에도 비슷한 대화를 했다. 이 대목에서 본 기자는 뭉클 했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그걸 이겨내고 웃으며 당당히 선 사람도 있는데 그 앞에서 내색하는 것이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 말대로 많이 벌지는 못해도 자기 일을 하고 있는데 소원이 있다면?”

“장가가고 싶유.” 하고 씨익 멋쩍게 웃는다.

“그럼 가야지요. 승일 씨 성격과 경험이면 장가갈 자격충분하지요.”

“먼저 차는 어떻게 했어요?”“먼저 차는 대리운전 하고부터 운행시간이 많아 37만 킬로나 탔더라구요. 이제 고생시켰으니까 퇴역시키고 새차 샀지요.”

“대리운전 계속할거예요?”“그럼요 술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내가 살아있는 한은 해야지요.”

그가 살아가는 모습이 비장애인의 눈에는 어떨지는 몰라도 자신의 사정에 맞게 자신의 길을 찾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아름답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양승일 씨, 그는 장애인이지만, 최소한 손님에게 바가지 씌우지도, 속이지도 않고 남에게 손 벌리지도 않는 당당한 직업인이다.

승일 씨를 인터뷰 하러가서 본 기자는 두 시간을 기다려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장애인복지관 2층에서 탁구삼매경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탁구솜씨는 매서웠다. 스매싱과 커트, 역회전 볼에 능수능란하게 대응하고 상대방을 경기내내 강공으로 몰아 부치고 있었다.

“왜 이렇게 탁구를 잘해요?”

“서산장애인 대표선수인디 이 정도는 해야죠. 탁구국가대표를 넘 볼판인디.”

승일 씨는 2008년부터 탁구를 시작하였다. 원래는 낚시광이었다. 그러던 양 씨가 탁구에 재미를 붙이고 나서는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2012년 11월 도지사배 충남장애인 탁구대회에서 단식과 복식 모두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2관왕이 되었다. 다른 말로하면 단식부분에서는 충남 최고수가 된 것이다. 승일 씨는 올해 4월에 있을 서산시장배 탁구대회와 5월말이나 6월초에 있을 충남장애인 체육대회에 서산시 대표로 나가게 된다.

“당연히 목표는 우승이지요.”

“그럼 그 좋아하던 낚시는 어쩌구?”

“쉽게 생각해서 추우면 탁구, 날 풀리면 낚시한다고 보면 돼요.”

“예전에 저수지 낚시할 때 보면 풀밭에 길을 닦아놓고, 어려운 곳으로 내려가서 낚시 하던데 편하게 저수지 둑에서 하면 안되나요? 아주 걱정되던데...”

“걱정은 유~. 그게 다 남을 배려해서 제가 뽀인트 잡아주는 거잖유? 제가 없는 길을 뚫어 놓아서 남들도 뽀인트 찾기 좋으라고 내려가는 거유. 낚시는 뽀인트유. 뽀인트 아닌 곳에서 낚시 해봐야 헛거지 유~”

양승일 씨는 담배는 피워도 술은 별로 마시지 않는다.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까?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대리운전하고 낮에 탁구와 낚시로 피로를 푼다. 그것도 거의 매일 탁구를 하던지 낚시를 한다. 탁구를 시작하고부터는 낚시출조 횟수가 현저히 줄었다. 두 가지 중 하나를 거의 매일 하려면 늦은 밤 일 마치고 자기관리를 잘해야한다. 그 부분을 잘 관리하는 것은 분명하다.

대리운전에 대해 남들은 사업이 망하고 하는 것, 직업을 잃고 하는 것, 부업으로 하는 것으로 치부해버릴 수 있지만 양승일 씨에게는 그것이 소중한 본업이다. 그 본업에 대해 매우 충실하고 당당하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다. 사회적응에 대한 어색함을 농담과 위트로 넘길 줄 아는 마음의 여유도 있다. 다만 어려서 굳어진 수줍음과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은 충남 대표급이 될 정도로 늘어버린 탁구실력이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조심스럽게 바래본다. 성격과 인품은 장애인들을 위해서 더 많은 사회적 활동을 요구받는 양승일 씨이지만 그 수줍음이 항상 그에게 약간 걸림돌이 되나보다.

양승일 씨는 장애인 모임일원으로써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의 장애인을 위한 봉사활동도 한다.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이유다. 아름다운 장애인 시리즈 어느 순간에 그 봉사활동이 무엇이고 그 봉사활동이 우리 비장애인들에게 어떤 삶의 의미를 주는지 한번 깊숙이 다뤄보도록 하겠다. 양승일 씨는 오늘도 해가 숨고 나면 술 취한 사람들을 위해 길을 달린다.

독자들께서 양승일 씨 대리운전을 이용하려면 6,000 콜 대리운전 사무실로 전화하여 양승일 씨를 지정하면 된다. 그러나 지정한다고 매번 연결되는 것은 아니니 만나보고 싶으면 자주 하시길...

백다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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