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매우 어렵다. 취업은 어렵고 물가는 오른다. 젊은이는 끊임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고, 비정규직으로 내몰린다. 취업을 했다고 하여도 근로기준법의 지켜지지 않는 사각지대와 열악한 근무여건속에서 종종 인권이 유린되기도 한다. 88만원 세대로 규정지어지는 젊은이들의 좌절이 사회 곳곳에서 비명을 지른다. 이 암울한 시대에 우리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모 잘 맞나 좋은 직장을 가지는 사람들, 몹시 잘생겨 연예인으로 풀리거나 신체능력이 탁월해 유명한 운동선수가 되는 사람들 이야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리지역에서 심한 장애를 딛고 당당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담히 다룸으로써 장애인들의 삶을 조금 엿볼 기회도 가지고 그들이 어떻게 자신들에게 닥친 장애를 극복해 나가는지 알림으로써 이들보다는 유리한 조건의 어려운 비장애인들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저 구름위의 잘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보다 모든 여건이 불리할 장애인들의 당당한 모습에서 우리 자신도 반성하고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편집자 주

1. 서산시 지곡면사무소 행정도우미 권혜연 씨

“점심시간이었나요? 저 힘들지 않아요. 늘푸른 아파트 주민이 입주하고 조금 바빠진 거예요.”

“비장애인 민원인 상대하기 어렵지 않아요?”

2월 4일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밥을 먹으면서 인터뷰하려던 지곡면사무소 행정도우미 권혜인 (28)씨는 민원인들의 서식작성과 절차 등을 쉴 새 없이 설명하고 돕고 있었다. 12시 30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민원인들은 전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아 점심을 먹지 못하는데도 환하고 생글거리는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12시 30분이 넘어서야 민원인이 줄어들어 본 기자도 권혜연 씨도 비로소 밥을 먹을 수가 있었다.

“밥 먹어야지요.”

“도시락 싸왔는데 못 먹었네요.”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식사하면서 대화할까요? 점심시간마다 맨날 이렇게 직원 중 꼴등으로 밥 먹어요?”

“아니요 맨날 그런 건 아니에요. 오스카빌 입주가 있기 전엔 한가했어요. 입주 후 조금 바빠진 거예요. 맨날 그런 것도 아니고 민원인이 잘 몰라서 답답해하시는데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가끔 민원인 자신이 잘못하고 그 잘못을 제게 뒤집어 씌울 때는 억울할 때도 많지만 그분들이 오죽하면 그러시겠어요? 그래서 저는 무조건 친절하고 무조건 상냥하자고 생각하고 민원인을 대해요”

아마 민원인을 상대하는 대부분의 공무원들의 심정이 같을 것이다.

본 기자가 권혜연 씨를 처음 만난 것은 2005년경 장애인 사회적응행사장에서였다. 당시에 어리고 예쁜 아가씨가 다리를 저는 모습에 안타까웠으나 항상 웃고 밝은 언행에 금세 안타까움이 사라졌던 기억이 난다.

권혜연 씨는 1984년 농부의 6남매중 막내로 뇌병변 3급인상태로 태어났다.

사람들은 뇌병변이면 정신이 이상하거나 사고를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오해하기 쉬우나 권혜연 씨의 상태는 정상적인 사고에는 아무 장애가 없고 다만 오른쪽 팔과 다리의 사용이 약간 부자연스러운 상태일 뿐이다. 권혜연 씨를 보면 보다 보면 세상의 대부분의 비장애인들이 오히려 정신적인 장애를 앓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 취재기자 주 : 장애인과 비교하여 정상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매우 틀린 표현이다. 그 말은 장애인 가슴에 대못을 박는 표현이니 독자제위는 장애인과 정상인의 구분법 말고 신체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올바른 표현을 써주시기 바란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제가 장애인인줄 못 느꼈어요.

권혜연 씨는 지곡면의 대화교회병설유치원, 대성초등학교, 서일중학교, 서일고등학교 출신이다. 물론 나중에 온갖 고생을 하며 방송통신대학과정을 이수하였다

“저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제가 장애인인줄 몰랐어요. 모른다기보다 장애인이라고 설움 받은 기어이 없어요. 유치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친구들이 저를 장애인으로 대한 적이 없어요. 그 점 너무 고맙죠.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하려고부터 제가 장애인이라는 현실에 너무 암울했고요. 2~3년 심한 우울증까지 알았어요.”

지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살아온 과정을 회고하던 권혜연 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이 안 될 때 지독한 고립감과 현실사이에서 고통을 겪었노라고 실토하였다. 다행인 것은 그 말을 하면서도 조금도 그늘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는 솔직히 어렸을 때는 다른 장애인을 만나면 낯설고 이상했어요. 그만큼 제가 장애인인 것을 별로 느끼지 못한 것 같아요. 제가 자라면서 만난 모든 친구들과 선생님들께 고마워 해야 한다는 걸 어른이 되어서 알았어요. 그런데 제가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이 안 되고 마음을 터놓고 상담하고 이야기할 상대가 없을 때 정말로 절망스럽더라고요. 아 내가 취업도 안 되는 사회에서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장애인이구나. 그땐 정말 고통스러웠지요.”

“그 고통스러운 시절을 어떻게 이겨냈어요?”

“너무너무 힘들 때 장위모(장애인을 위한 장애인의 모임)의 김종인 회장님과 장애인복지관의 김경수 선생님 계시잖아요? 그분은 저보다 더 심각한 장애인인데 그분 말씀 듣고 장위모에 나갔어요. 거기 나가니까 청각장애인도 있고 척수장애인도 있고 나보다 훨씬 심각한 장애인들이 많았어요. 그분들 정말 그렇게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도 당당하게 살아가시잖아요? 제 이야기를 비장애인들보다 훨씬 빨리 이해해주시고, 또 그분들의 어려움도 제가 금방 이해되고 그런 과정 거치며 자연스럽게 힐링이 된 거 같아요. 그리고 나니까 희망도 생기고 의욕도 생기고 결국 방통대 과정도 이수했어요. 비록 정규적인 공무원은 못 되었지만 행정도우미로 일하게 되었잖아요?”

정신적이든 신체적이든 극한적 고통을 맛본 사람은 타인의 어려움이 자기 일처럼 다가오고 그 어려움을 더 잘 어루만져줄 수가 있다. 그건 고통의 결과이다. 신체 장애인들이 겪는 고통은 단지 몇 글자의 글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아빠. 나에게 큰 가르침을 주는 큰오빠, 항상 힘을 주는 장위모 회원들에게 감사하다

“출퇴근 어떻게 해요? 버스타기 너무 어려울 텐데...”

“매일 아빠가 해주세요. 제가 2007년도에 면허를 땄어요. 그런데 아빠가 걱정되시는지 차를 안내주세요. 직접 태워다주고 태우러 오시죠. 그래서 저는 면허증만은 있는데 장롱면허 됐어요. 아빠차도 제가할 수 있게 전부 개조했는데 아빠가 한 번도 안 빼고 저를 출퇴근시켜주세요.” 아빠에 대한 고마움을 권혜연 씨는 그렇게 표현했다

“살면서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정신적으로 도움준게 누구예요?

”그건 명문대학을 나온 큰오빠예요. 제가 뭘 잘했다 못했다 자주 말하는 건 아닌데 가끔 한마디 해주면 그게 그렇게 도움이 되고 많이 생각하게 해주더라고요. 그리고 사회에서 제게 가장 큰 도움주고 용기를 준 존재들은 장위모(장애인을 위한 장애인의 모임)이예요. 거기 나가서 같은 처지의 언니 오빠들 만나 이야기 나누면서 얼마나 도움 받은지 몰라요.“권혜연 씨를 인터뷰하느라 보낸 몇 시간 중 이명주 지곡면장은 “권혜연 씨 아주 잘해요. 잘하지요”라고 칭찬했다.

“내 또래 여성장애인들을 만나보고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만나고 듣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요.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몰라요.“

“앞으로 바라는 점이 있다면?”

“바라는 점요? 저 사진 찍는 거예요? 시집가야하니까 예쁘게 찍어주세요. 턱도 깎고 몸매는 날씬하게 뽀샵처리해주시면 안되나요? ㅎㅎㅎ.“

“뽀샵이라니 권혜연 양보다 더 예쁜 아가씨가 어디 있어요? 여기서 더 갸름하게 하면 진짜 장애인 되는 거야. 다른 아가씨들이 샘낼 외모가진 사람이 왜 그래요? ㅎㅎㅎ.“

"그래 앞으로 바라는 점이 있다면?

“네. 장애인들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장애인들이예요. 저는 서산의 장애인 모임에서 우리또래 여성장애인을 별로 만나지 못했어요. 우리또래에 나만 장애인 인가요? 또래장애인을 만나면 우리세대 이야기도 할 수 있고, 우리이야기도 할 수 있고, 서로 도움도 되고 맞장구만 쳐주어도 얼마나 힘이 되고 도움이 되는데요. 그냥 장애인 위한다는 프로그램보다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어 그 모임에서 서로 알게 되고 이야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공감은 참 좋은 약이예요. 공감말이예요. 그래서 저는 우리또래 여성장애인들을 만나고 싶어요.”

“그렇게 생각한 동기가 뭐예요?”

“제가 아까 말씀 드렸잖아요? 제가 고등학교 졸업 후 그렇게 외롭고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장위모의 회장님이던 김종인 회장님과 김경수 선생님 만나서 장위모 회원들 만나고 엄청나게 위안 받고 도움 받았다니까요? 그러니 이제 제가 저 같은 어려움을 겪을 우리또래 여성장애인을 만나서 경험도 나누어주고 공감해주고 그러면서 서로 힐링이라는걸 해주고 싶은 거예요. 장애인끼리 공감이 무척 중요해요.”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장애인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치료법이 나온 것도 아니고 장애인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는 많지만, 장애인들에게 장애인들 간의 공감보다 더 좋은 보약은 없다. 큰 수술을 해본 본 기자는 본 기자와 비슷한 증세를 가진 사람을 보면 금세 공감하고 경험을 나눠주고 싶고 그러면서 자주 안부를 묻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리라.

“장애를 가졌다고 특히 여성이라고 숨어드는 현실 그 현실에서 공감하고 공유하고 돕고 교류할 수 있다면 여성장애인들에게 더 많은 사회적 기회도 열릴 수 있을 거예요. 꼭 여성장애인들을 위한 특히 또래 장애인들을 모이게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이런 삶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밝고 건강하게 말할 수 있을까? 웬만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회한의 긴 한숨부터 내쉴 텐데 권혜연 양은 인터뷰 내내 전혀 그런 반응이 없었다. 정말로 자기 장애를 당당하게 극복하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자신감이었다. 참 발고 씩씩한 아가씨다.

인터뷰를 마치고 다시 자신의 일터로 돌아가는 권혜인 씨를 보면서 많은 정책적 고민과 사회적 현실에 대해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권혜연 씨의 취미는 사진 찍기다. 본 기자도 그녀에게서 사진을 배워야겠다. 주변인들은 그녀를 ‘권작가’라고 부르기도 했다.

권혜연 씨는 아홉시에 출근해서 여섯시까지 근무하고 약 100만 원 정도의 급여를 받는다. 권혜연 씨의 행정도우미로써의 역할을 보든, 최저임금체계를 보던 서산시청이 조금 더 감안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권혜연 씨는 복지서산의 큰 자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백다현 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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