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독립만세운동기념탑 및 필경사

최근 일본의 일부 일본 국회의원들의 돌출행동과 일본 정부의 독도 영유권 주장 문제 등 광복 66주년을 맞아 당진의 독립만세운동사를 돌아본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은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에 파급되었다. 당진군의 최초 독립만세운동은 3․1운동을 직접 목격한 면천보통학교 원용은은 동급생 박창신과 급장 이종원과 3. 10일 전교생들과 대한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 16세의 원용은과 18세인 박창신 두학생은 공주형무소에서 4개월간 수감되었다 석방되었다. 이는 당진군내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되었다.

또한 4월 4일에는 대호지면 광장에서 이인정, 송재만, 남주원 등이 중심이 돼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서울 파고다공원의 3.1운동에 참여하고 돌아온 남주원, 이두하, 남상직, 남상락 등이 독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천의장날에 결행하기로 하였다.

4월 4일 대호지 광장에서 아침 9시를 기해 600여명이 모여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애국가 제창에 이어 곧 바로 만세시위에 들어가 정미면 천의장터까지 진출하였다. 천의장터에서는 1천여명의 군중이 만세에 참여하였으며 주재소 습격 등의 격전을 벌인 곳으로 지금도 만세장터라 부른다.

이때 형벌을 받은 사람은 현장 사망 1명, 옥중사망 3명, 징역형 40명, 태형 88명, 벌금형 1명 총 185명에 달했다.

3.1운동은 민족의 독립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하였으나, 독립에의 자신감과 함께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바로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로드(v narod)운동이다. 심훈(沈熏)은 1932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그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당진으로 내려왔으며, 독립하여 살고자 이 집을 직접 설계하여 필경사(筆耕舍)라 이름하였다.

한국 농촌소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상록수),《직녀성》 등이 여기에서 집필되었다. 상록수가 씌여질 무렵 농촌은 무지와 빈곤 속에 극도로 피폐되어 있었다, 이러한 극한 상황 속에서 문맹퇴치와 빈곤 타파에 목적을 둔 브나로드운동이 한창 성행하였다.

심훈은 상록수를 통해 농촌의 빈곤과 무지의 원인을 가진 자의 횡포와 없는 자의 고통으로 대립시켜 시대적․사회적 맥락에서 알리려하고 있다.

상록수는 당시 당진에서 운영되던 공동경작회를 모델로 하여 집필된 것으로 당진이 상록수 정신의 발상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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