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 예속을 탈피하는 민족적 권리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쟁취하는 민주적 권리

청소년과 여성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인권적 권리

 

84년 전 1927년 2월 15일 오후 7시 서울 한복판 YMCA 회관에서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우리 민족의 항일독립운동사에 있어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조직과 단체들이 명멸했지만 신간회만큼 당시뿐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학계는 물론 국민들에게 여전히 관심과 주목을 받고 회자되는 항일독립운동단체도 드물다.

그것은 해외에까지 지회를 조직하여 회원수가 최대 3만9000명을 넘는 국내 최대의 조직이었다는 점과 함께, 일제 강점 이후 '민족해방'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졌음에도 지역과 인맥 특히, 이념 차이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좌와 우로 나눠져 있던 독립운동 세력이 하나의 강령과 규약 아래 결성된 조직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신간회의 태동부터 잠시 살펴보면 1919년 3·1운동 이후 민중의 폭발적인 저항에 놀란 일제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겉으로는 '문화통치'라는 유화정책을 구사하면서도 뒤에서는 친일파들을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여기에 부화뇌동하여 이광수를 비롯해 최남선 최린 송진우 김성수 등이 이른바 '자치론'을 들고 나오자 민족주의 운동 계열의 홍명희 안재홍 신채호 등이 이에 반발하면서 비타협적 민족주의 운동 노선을 견지하고, 여기에 민중들과 결합해 폭넓은 기반을 형성한 권동진 허헌 한위건 등의 사회주의 운동 계열이 결합해 탄생한 것이 바로 신간회다.

당초 신한회(新韓會)로 하려던 명칭은 일제의 간섭으로 신간출고목(新幹出枯木) 즉 '마른 나무에서 새로운 줄기가 싹 튼다'는 뜻의 신간회로 정해지고 3대 강령으로 ①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하며 ②단결을 견고히 하고 ③기회주의를 일체 부인 하였다. 세 번째 강령은 말할 것도 없이 자치론자들에 대한 배제를 뜻한다.

월남 이상재 선생을 초대 회장으로 출범한 신간회는 우리 민중들이 싸워서 얻어 낸 합법공간에서 많은 정치·사회적 실험을 벌여 나간다. 그동안 상층 명망가 중심의 운동을 극복하기 위해 '아래로부터의 조직'을 주창하면서 전국과 해외의 지회를 120여 개나 건설하는 놀라는 성과를 보여준다.

또한 신간회는 정치경제 예속을 탈피하는 민족적 권리,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쟁취하는 민주적 권리, 청소년과 여성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인권적 권리를 주장하면서 일제와 그에 타협하려는 세력에 대해 적지 않은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실제로 신간회 창립으로 기층 민중들의 요구가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926년 119개이던 농민단체의 결사가 1927년에 160개, 1928년에는 307개로 늘어나고 신간회가 해소된 1931년에는 무려 1759개에 이른다. 또한 소작쟁의 발생 건수 역시 1926년에 198건이던 것이 1927년에는 275건으로 늘어나고, 1931년에는 무려 1590건의 크고 작은 쟁의가 발생한다. 이는 마치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을 기점으로 노동자는 물론 농민 빈민 교원 등 억눌렸던 민중들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던 양상과 비슷하다.

비록 일제의 집요한 방해와 신간회 구성원 중 일부의 변절과 타협으로 신간회 내부의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 못해 4년 만에 자진 해소한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신간회는 당시는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영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첫째,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대의를 위해 기꺼이 하나가 되어 결합한 통합성. 둘째, 국권 상실 후 끊임없는 항일투쟁으로 쟁취한 합법공간을 최대한 이용해 중간 계층을 아우르려 한 유연성. 셋째 상층 명망가 중심의 운동이 아닌 기층 민중들과 함께 하려고 한 대중성이 그것이다.

이는 2011년 진보와 보수, 자본지상주의에 빠진 빈부의 갈등, 약육강식의 무한 경쟁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 날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해도 손색없는 가르침이 아닐 수 없으며 해방 이후 4·19의 혁명정신, 80년 광주의 대동정신 그리고 87년 6월의 항쟁정신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민족의 항일독립운동사에서 시대정신을 표출했던 신간회를 주도했던 월남 이상재 선생의 84기 추모식이 지난 29일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생가에서 거행됐다.


월남(月南) 이상재

 

민족운동가이자 청년운동가인 이상재(李商在)의 본관은 한산이며, 자는 계호(季皓)이고, 호는 월남(月南)이다. 그는 1850년 10월 26일 충청남도 한산군(현 서천군) 북부면에서 아버지 희택(羲宅)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고, 1864년 강릉 유씨(劉氏)와 결혼하였다. 1867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탐관오리들의 매관매직 때문에 낙방하였다. 이를 개탄한 월남은 낙향하여 은둔하고자 했으나, 친족의 권유로 당시 승지였던 박정양(朴定陽, 1841-1905)의 집에서 식객으로 있다가 이후 1880년까지 13년 동안이나 개인비서로 일했다.

1881년 월남은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조준영, 김옥균 등 10명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유길준, 윤치호, 안종수, 고영희 등과 함께 일본을 방문했다. 이때 월남은 일본의 신흥문물과 사회의 발전상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으며, 홍영식, 윤치호, 유길준 등과 두터운 교분을 쌓고 귀국한 뒤 개화운동에 참가할 것을 결심했다.

1884년 우정총국(郵政總局)의 총판(總辦) 홍영식이 그를 인천 우정국의 주사(主事)로 임명했으나, 그해 12월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실패로 낙향하였다.

1887년 월남은 내무협판으로 있던 박정양에 의해 친군영(親軍營)의 문안(文案)으로 임명되었고, 그해 6월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갈 때 2등 서기관으로 채용되었다. 1888년 10월 귀국한 뒤 잠시 낙향하였으나, 1892년에 전환국 위원, 1894년에는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각 참찬관, 학부아문 참의 겸 학무국장이 되었다. 이때 그는 신교육제도를 창안하여 사범학교, 중학교, 소학교, 외국어학교를 설립하였고, 한때는 외국어학교 교장을 겸하기도 했다.

월남은 1896년에는 내각총서와 중추원 1등 의관이 되었고, 다시 관제개편에 따라 내각총무국장에 올라 국운을 바로 잡기에 힘썼다. 이 해 7월 그는 서재필, 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간부를 역임하였으며,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의 의장과 사회를 맡아보았다. 당시 그는 독립협회의 각종 토론회에서 명사회자로 이름을 날렸다.

1898년 11월 월남은 종로에서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을 때 척외(斥外), 황권(皇權) 확립 등의 6개 조항을 의결하여 두차례 상소문을 올렸다. 이 때문에 동지 16명과 경무청에 구금되었으나 심상훈의 간곡한 상소로 10일 만에 석방되었다.

1898년 12월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방해로 해산되자, 월남은 모든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혔다.

그러나 정부 대신들의 미움을 받아 1902년 6월 정부 전복을 음모했다는 이른바 개혁당 사건에 연루된 월남은 한성감옥서에 구금되었다가 1904년 2월 석방되었다. 월남은 감방에서 우연히 거적자리 밑에서 발견한 요한복음을 읽다가 감동받은 다음 열심히 성경과 기독교 관련서적을 통독하고 54세의 나이에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위대한 왕의 사자’가 세번이나 믿을 기회를 주었는데도 왜 신앙을 하지 않느냐고 질책하는 신비체험을 했다고 전한다. 월남이 워싱턴에 있을 때 기회를 주었는데 거절한 것이 첫번째 큰 죄이고, 독립협회에 가담했을 때도 기회를 주었는데 자기만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믿지 못하게 방해한 것이 두번째 죄이고, 결국 민족이 진보할 길을 막았으니 더욱 큰 죄를 지었으니 지금이라도 잘못을 회개하라는 내용이었다. 이후 월남은 하느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심을 확신하고 성경을 세번이나 통독하면서 기독교신앙을 통한 부국강병책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1904년 2월 월남은 감옥에서 석방된 뒤 서양선교사 게일이 담임목사로 있던 연동교회에 옥중동지들과 집단 입교하여 세례를 받았다.

또한 그는 김정식, 유성준 등과 함께 1905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전신)에 가입하여 초대 교육부 위원장이 되어 민중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후 그는 1908년 기독교청년회의 종교부 총무를 맡아 성서연구반을 조직하여 성경 중심의 신앙운동을 주도했으며, 1909년에는 “동포여 각성하라”를 외치며 구국운동에 앞장섰고 ‘백만인 구령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강탈되고 일제가 무단통치를 강행하자, 월남은 노동야학을 개설하여 가난한 청소년들의 교육에 헌신하였다. 1913년 월남은 63세의 나이로 기독교청년회 총무에 취임하여 사멸 직전의 청년회를 사수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그는 1926년 명예총무로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청년회의 재정 확립과 지방으로의 확장을 이룩하였다.

1914년 월남은 재일조선YMCA를 비롯한 세브란스, 배재, 경신과 개성의 한영서원, 광주의 숭일, 군산의 연맹, 전주의 신흥, 공주의 연맹 등 학생 YMCA를 망라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였다.

1917년에는 민중계몽운동에 전념하면서 날카롭고 의미심장한 풍자와 해학을 구사하며 항일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모든 민간단체가 일제에 의해 해산되었고 집회, 출판, 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하였으나, 오직 YMCA만은 해산당하지 않고 이후 1919년 3.1운동의 발판이 되었는데 이는 월남의 탁월한 지도력 덕분이었다. 그는 3.1운동을 배후에서 주도했다는 죄목으로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부터 월남은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전국연합회 회장으로서 제 2독립운동, 물산장려운동, 소년척후대운동, 학생청년회운동 등을 주관하였으며, 각종 강연회, 토론회, 일요강좌, 농촌운동, 지방순회운동, 각종 체육활동, 음악회 등을 통해 폭넓은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한편 그는 부모제사를 지내는 일은 결코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선언함으로써 기독교의 잘못된 부모 공경방법을 "부모제사 모시는 일 우상숭배 아닙니다"라며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1922년 월남은 신흥우, 이대위, 김활란, 김필례 등의 대표단을 이끌고 북경에서 열린 제1차 만국기독교학생동맹대회(WSCF)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한국 YMCA가 단독으로 세계YMCA연맹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으며, 한국 YMCA 창설에도 기여하였다.

1922년에는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하였고, 1923년에는 조선민립대학 기성회를 조직하여 준비위원장이 되었고, 창문사를 설립하여 기독교 문서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또 그는 1924년 조선일보사 사장, 소년척후단(보이스카웃) 초대 총재, 1925년 제 1회 전국기자대회 의장으로서 한국 언론계의 활동 진작과 단합에도 기여하였다. 1927년 1월 민족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에서 이른바 민족의 단일전선을 결성하고 공동의 적인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할 때, 월남은 창립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해 3월 29일 월남은 서울 재동 자택에서 가족들이 부르는 찬송가 소리를 들으면서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는 성대한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한산에 있던 선영에 안치되었다. 이후 1957년에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고, 변영로가 쓴 묘비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유저로는 논문집 ‘청년이여’를 비롯하여 ‘천년위국가지기초’(靑年爲國家之基礎), ‘진평화’(眞平和), ‘청년회문답’ 등이 있다.

월남은 넓은 도량과 고매한 인품의 소유자로 여유있는 풍자와 기지가 넘치는 해학으로 당시 살벌했던 사회분위기를 순화시켰고 일제의 침략과 불의를 날카로운 경구와 유머로써 제어했다.

또한 그는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지만 강직한 기상과 굳센 의지를 지녔고, 항상 정열에 불타 나라를 사랑한 ‘만년 청년’으로서 청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기독교정신을 심기 위해 노력한 청년운동가요 교육가였다. 특히 월남은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무저항 비폭력의 민족운동을 주도한 위대한 선각자요 시민운동의 등대로서 ‘조선의 거인’ ‘조선의 성자’로 추앙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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