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갑 순 서산시의회의원

장갑순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눈의 선천적인 기질이 일으키는 생물학적 오류. 우리는 그것을 착시라 부른다.

최진기의 〈인문의 바다에 빠져라〉에선 “역사는 현재에 있어 화려한 첨단 과학과 기술의 착시로 진보‘되어’진다.”고 말한다. 역사를 제대로 보라는 뜻일게다.

제대로 인식하는 것.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 것.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불편한 진실에 가까워지고자 할 경우 더욱 그렇다.

에어포칼립스(airpocalypse). 대기오염으로 인한 대재앙을 뜻하는 말의 실험적 영상들인 1952년 런던 스모그, 1984년 인도 보팔 대참사, 구체적 사건들의 깨진 영상 파편들이 가슴 깊이 와 닿는다.

세계에서 대기오염이 가장 급격하게 심해진 도시가 충남 서산시 대산읍이라니,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익히 보던 그 이름, 대산.

착시이고 싶은 심정. 착각이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20세기 현대 실용주의의 방점을 찍은 우주 개발국. 미국의 우주개발 핵심처인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관측한 10년간의 자료들이 대산을 지목했다.

언론의 대중 장악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상상력은 대산읍민의 만성질환인 불안 증세를 더욱 악화시킨다. 며칠 만에 내린 응급보도. ‘서산 대산단지, 대기오염 변화 적었다.’하지만 충격의 쓰나미(tsunami) 뒤 후속 조치라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미약하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을 명료케 하는 것. 수치. 하지만 수치적 민감성이 때로는 과민성 대사증후군을 일으키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알고도 참는 것과 몰라서 참는 것은 현격히 다르다. 대산읍민은 몰라서 참은 게 아니다. ‘필요악’이라 그랬다.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국가관. 감정적 흥분 상태가 그랬다. 궁극적으로 서산시 발전, 충남발전을 위해 그러해야만 했고, 그렇게 했다. 대산읍민이 수십 년 간 해왔던 일은 오로지 한 가지. 참는 일.

세계에서 대기오염이 가장 급격하게 심해진 도시, 그 비운(悲運)의 주인공인 대산. 글루미(gloomy) 선데이의 연출자는 대한민국. 스탭은 충남도와 서산시다.

클라이막스를 치닫고 있는 대산읍민의 과민성 대사증후군.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위안과 위로다. 그리고 지원과 혜택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모두를 신경 써야 하는 기지(機智)를 발휘해야 할 때다.

대산석유화학단지 주변지역 지원 법률을 제정하고 읍민들을 위한 배려를 확대하는 일. 총 연출자의 역할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이런 것 들이다. 스탭들 또한 연출자에게 정확한 데이터를 제공하는 일. 그래야 정확한 판단이 가능하다.

2016년 대산. 바다와 대륙을 잇는 도시, 꿈이 현실이 되는 도시. 그렇기에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도시다. 이를 구체화하기도 했다. 대산~당진 간 고속도로 건설, 중국과의 국제여객선 취항, 심지어 철도신설의 가능성까지 품었다. 그러나 부푼 희망 속 외딴섬이 있다. 마음의 섬.

감동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만성화된 불안 증세를 호전 시킬 수 있는, 깊은 숨을 쉴 만큼의 공기만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대산읍민의 인내 수치는 미국과 충남도에서 발표한 이산화질소 추정치를 넘은지 오래다. 하지만 수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말이다.

눈에 보이는 건 착시일 수 있다. 하지만 대산읍민이 느끼는 고통. 그것은 본질의 문제다. 수치로 따질 수 없는 아픔인 것이다. 수치로 고통의 강약을 측정할 수는 있어도 그러한 아픔을 겪어 보지 않고서는 당사자의 고통이 얼마만큼 인지 알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래도 수치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그래도 충남도의 발표를 믿고 싶은 게 필자의 심정이다.

언론으로 들끓었던 자리에 잠복했던 신(新)증후군인 불신이 들불 번지듯 퍼져나가고 있다. 응급 처방책은 공개와 대책. 장기적으로는 대산읍민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는 노력이다.

최근 꽤 재미있게 본 드라마가 있었다. 시청자의 감수성을 자아내는 연출 기법이 훌륭하다. 과거에 대한 공감이랄까. 응답하라. 대한민국, 그리고 충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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