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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특집 ‘조선의 레닌’이라 불린 예산출신 박헌영
편집 | 승인2012.06.29 09:52

한국전쟁이 발발하진 이미 60년 하고도 2년이 지났다. 아직도 동족상잔의 아픔은 전국 방방곡곡 산하에 잠들어 있고, 분단의 아픔인 38선은 녹슬어도 칼날 같은 전운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6.25와 관련하여 우리 내포지역으로서는 한번쯤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인물이 박헌영이다. 박헌영은 1900년 충남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 금광마을에서 박현주(朴鉉柱)와 소실인 어머니 이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한문을 배우다 12세 되던 해인 1912년 예산군 대흥면 대흥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졸업하였다. 그 해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에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영어반에서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계속 영어공부를 하는 한편, 승동교회에 다니면서 미국유학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박헌영은 3·1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하다가 192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어 있어 민족운동의 거점이었던 중국 상해(上海)로 갔다. 상해에서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부설강습소에 다니면서 영어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임원근(林元根) 등과 알게 되었다.

그는 이 당시 임원근·김단야(金丹冶)·최창식(崔昌植) 등과 함께 김만겸(金萬謙)의 이르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에 입당하였다. 정식으로 공산당에 입당한 이후 프랑스조계에 위치한 사회과학연구소에서 공산주의 선전팜플렛을 번역하는 일에 열중하였으며,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1921년에는 허정숙(許貞淑)의 소개로 뒤에 국내에서 결혼하게 되는 두 살 아래의 주세죽(朱世竹)을 만나 열애에 빠지기도 하였다.

1921년 늦가을 김단야·임원근과 함께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키 위하여 모스크바로 가, 다음해 1월 고려공산청년동맹 대표로 참가하였다. 1922년 4월에 김단야·임원근과 함께 국내공산당 조직을 위해 귀국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징역 1년 6월의 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24년 1월 만기 출옥한 직후 그 해 2월 결성된 신흥청년동맹에 가입하여 김찬(金燦)·신철(辛鐵) 등과 청주·대구 등 전국 28개 도시를 순회하며 <청년의 사회적 지위>·<식민지청년운동> 등의 주제로 강연을 하였고, 기관지 ≪신흥청년≫의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4월 허헌(許憲)이 사장으로 있던 ≪동아일보≫에 기자로 입사하였다.

같은 시기에 국내 청년단체의 통일조직인 조선청년총동맹이 창립되자, 한신교(韓愼敎)·주종건(朱鍾建)·최순탁(崔順鐸)·강제모(姜齊模) 등과 함께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4년 9월에는 홍증식(洪增植)의 추천으로 ≪조선일보≫ 사회부로 자리를 옮겼으나, 10월 15일 신일용(辛日鎔)의 <조선과 러시아의 정치적 관계>라는 사설이 문제가 된 ≪조선일보≫ 제3차 정간사건으로 임원근·김단야와 함께 해직되었다.

1925년에는 국내의 공산당 조직을 결성하기 위하여 국내 공산주의운동의 한 핵심분파로 박헌영이 속해 있던 화요회(火曜會)계가 중심이 되어 4월 20일에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4월 15일 전조선기자대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하여 일본경찰의 관심을 흩어놓고, 4월 17일 김약수(金若水)·김재봉(金在鳳)·윤덕병(尹德炳)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창당대회를 개최하여 마침내 국내 공산당 조직을 창설하게 되었다.

1925년 4월 18일에는 자기 집에서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고 책임비서직을 맡아 본격적인 조직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그 해 11월 30일처 주세죽과 함께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잡혀 복역하게 된다.

공판 도중 미친 사람으로 가장하여 1927년 11월 병보석으로 출감, 다음해인 1928년 11월 국내에서 탈출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인 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였다.

1929년 6월에는 모스크바로 옮겨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2년간 수학하였으며, 1932년 1월 상해로 가서 김단야와 접선하여 김형선(金炯善)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코뮤니티≫라는 기관지를 제작, 국내에 배부하다가 1933년 7월 상해 일본영사관에 잡혀 경기도 경찰부로 압송, 치안유지법·출판법 위반으로 기소, 6년형을 언도받아 복역하였다.

1939년 만기로 출소하여 김삼룡(金三龍)·정태식(鄭泰植) 등과 함께 세칭 경성콤그룹을 조직하는 데 지도역할을 하였으나, 1942년 12월 일본경찰이 검거망을 좁혀오자 광주로 피신하여 김성삼(金成三)이란 가명으로 기와공장 인부로 취직하여 몸을 숨겼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8월 19일 서울로 올라와 광복 다음날 결성된 장안파 공산당에 대항하여 8월 20일 김형선·이관술(李觀述)·김삼룡·이현상(李鉉相) 등과 함께 회합을 가지고 공산당 재건에 주력하였다.

9월 3일 세칭 장안파와 재건파가 연석회의를 가지고, 이를 통합한 조선공산당의 중앙기구를 구성하여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이 당시 그는 소위 8월 테제, 즉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테제를 발표하여 당시의 혁명단계를 민주주의 혁명단계로 규정하여, 노동자뿐 아니라 농민 및 양심 있는 지주·자본가와도 연합하여 혁명전선을 결성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실천에 있어서는 모험주의적 노선에 편향되어 연합전선과는 거리를 보이게 되었다.

이후 이승만이 미국에서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창설하자 10월 23일 조선공산당을 이끌고 이에 참여하였으나 11월 16일 친일파를 우선적으로 숙청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면서, 선건국 후친일파숙청을 내세운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서 탈퇴하여 이승만과의 연합을 포기하게 된다.

1946년 2월 15일 좌익세력의 총결집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결성되자, 여운형(呂運亨)·허헌·김원봉(金元鳳)·백남운(白南雲)과 함께 의장단의 일원으로 선출되는 등 활약하였다.

이 해 7월 12일 이른바 조선공산당 위폐사건을 계기로 좌익세력에 대한 탄압국면이 전개되면서 9월 6일에는 미군정이 박헌영 등 공산당 핵심간부에 대한 검거를 감행하려 하자, 하루 전인 1946년 9월 5일 관속에 누워 영구차 행렬로 자신들을 위장, 북한으로 탈출하게 되었다.

그 뒤 1946년 11월 3일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 및 남조선신민당이 합쳐 남조선노동당으로 결성되자 부위원장에 취임하였으며, 계속 북한에 머물면서 이른바 ‘박헌영 서한’을 통해 남로당의 활동을 지도하였다.

1948년에는 남한에서 단독선거에 의한 총선거가 실시되자 지하선거를 실시하여 8월 29일에는 해주에서 남한선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60명을 선출하는 데 주도적인 활동을 하였다.

1948년 9월 9일 북한에 정권이 수립되자 부수상 및 외상에 취임하였으나, 세력기반이 남한에 있는 그는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에게 실권을 빼앗겼다.

1950년 1월에는 ‘남로당의 한국화’·‘남로당지하당의 남북통일에 관한 정책입안의 건’ 등을 작성하도록 지시하기도 하였으며,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10월에는 인민군내에 총정치국을 창설하여 인민군 중장으로 참전하였다.

6·25전쟁 발발 원인에 관한 북한의 남침설 중의 한 갈래로 박헌영이 자신의 지지기반인 남한을 해방하여 자신의 세력을 만회하려 했다는 주장도 있다.

1953년에 김일성에 의하여 남로당계 숙청이 감행되면서 8월 3일 체포되어 평안북도 철산군 내의 산골에 감금되어 고문을 받다가, 1955년 12월 15일 미국의 첩자라는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되었다.

1955년 12월 15일 북한의 최고재판소는 특별재판을 통해 박헌영에게 사형 및 전 재산 몰수형을 선고했다. 재판의 공식 명칭은 ‘미제국주의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사건’으로, 박헌영을 제외한 남조선노동당 계열의 12명은 1953년 7월 30일 기소되어 7일 후인 동년 8월 6일 판결이 내려졌던 반면 박헌영은 2년이 더 지난 1955년 12월 3일 기소되었다. 두 사람을 제외한 전원이 사형 판결을 받았고, 박헌영은 1956년 7월 총살형에 처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판결문에 의하면 박헌영은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때 일본 경찰에 비밀조직을 모두 자백했으며,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사건 등을 배후에서 조종, 미군정에 대해 반대활동을 지시했던 박헌영이 실제로는 하지 중장의 지시를 받으면서 공산당을 친미의 방향으로 인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 조직을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에 노출시켜 소위 ‘혁명역량’을 파괴하였다고 판시했다. 또 1946년 월북한 이후에는 이승엽과 이강국을 통해 미군정에 북한의 자료를 제공하였으며, 한국전쟁 기간 중인 1952년 9월 무장 쿠데타로 정권을 전복하려 했다고 돼 있다. 연희전문학교 교장인 언더우드와의 관계, 1945년 9월 9일 미군 상륙을 앞두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응하기 위해 조직한 조선인민공화국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였다는 점 등이 판결문 속에 나타나는 것도 주목된다(재판 발췌문은 김남식의 『남로당 연구』에 수록).

1945년의 시점에서는 비밀조직이 아니었던 조선공산당의 책임자로서 미군정 책임자를 만난 사실이 모두 간첩 활동으로 돼 있다는 점은 이 사건이 정치적 사건이었음을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 직후 박헌영이 중국의 고위 관리에게 북한 정권을 전복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친중 정권을 수립하겠다는 의향을 밝혔다는 최근 중국에서의 증언들을 감안한다면, 박헌영과 남조선노동당 계열 인사들의 북한정부 전복 움직임이 사실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미국의 간첩 혐의로 재판을 받아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은 한국현대사의 미스터리 중 하나다. 재판 시점과 판결문 속에 나와 있는 전쟁을 전후한 시기 38선 이남에서 있었던 공산당 활동의 실패 등을 고려한다면, 전쟁 실패의 책임을 박헌영에게 전가하려 했던 정치적 의도를 읽을 수도 있다. 5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역사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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